귀납적 일반화에 문제는 없는가?
귀납적 방법의 두 번째 단계인 일반화 과정은 첫 단계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이 문제는 지금까지도 철학자들에게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것으로, '귀납의 문제'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개별 명제 1] 첫 번째로 관찰한 백조는 희다.
[개별 명제 2] 두 번째로 관찰한 백조는 희다.
[개별 명제 3] 세 번째로 관찰한 백조는 희다.
[개별 명제 4] 네 번째로 관찰한 백조는 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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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 명제 n] n번째로 관찰한 백조는 희다.
-------------------------------------------------------- [식 3]
[보편 명제] 모든 백조는 희다.
귀납 추론의 장점은 내용 확장적이라는 것, 즉 전제에 들어 있지 않은 내용이 결론으로 도출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귀납의 문제 또한 바로 이 점 때문에 생긴다. 백조의 색에 관한 귀납 추론인 [식 3]과 이전에 설명한 '편견 없는 수집의 불가능성'을 함께 생각해 보자.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백조들을 다 관찰할 수 없는데 [식 3]의 결론은 '모든 백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모든 백조'에는 관찰되지 않은 백조, 즉 전제에 등장하지 않은 백조도 포함된다. 따라서 [식 3]의 귀납 추론은 관찰된 백조들에 관한 사실들만 가지고 관찰되지 않은 백조에까지 적용되는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관찰된 백조들이 모두 희다고 해서 관찰되지 않은 백조들도 모두 희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희지 않은 백조가 살고 있거나 앞으로 태어날 확률이 0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다시 말하자면 흰 백조를 관찰한 사례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어떠한 근거에서도 "모든 백조는 희다"는 결론이 참이라고 말할 수없다는 것이다.
반세기 전에 타계한 영국의 철학자 러셀은 '칠면조 역설'을 통해 귀납의 문제를 쉽게 드러내 주었다. 어떤 칠면조 농장의 주인이 100일 전부터 매일 저녁 6시에 먹이를 주어 왔고, 바로 내일 칠면조들을 도축할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오늘 저녁을 받아먹은 칠면조가 귀납 추론을 통해 "주인은 모든 날 저녁 6시면 나에게 먹이를 준다."고 결론을 내리고, 내일도 주인이 저녁 6시에 저녁을 줄 것이라고 믿는 것은 과연 옳은 판단일까?
귀납의 문제가 칠면조에게만 위협적인 것은 아니다. 고속도로변의 위태위태한 절벽이 지난 10년 동안 무너지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계속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짓는 식의 사고방식은 사람의 일상생활에도 위험을 가져울 수 있다. 그러나 귀납의 문제가 정말 심각한 것은, 우리가 '인과적 법칙'이라 믿는 것들의 지위마저 뒤흔들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18세기 영국의 철학자 흄은 우리가 원인과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반복 관찰되는 현상의 선후 관계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도전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간단한 예를 하나 생각해 보자. 우리는 손으로 연필을 밀면 연필이 움직이는 것을 본다. 몇 번을 밀어도 연필이 움직이는 현상은 계속 나타난다. 이때 우리는 "연필이 움직인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손으로 밀었기 때문이다."라고 답한다. 연필의 움직임은 내가 손으로 민 것과 인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손으로 밀면 연필에 힘이 가해지기 때문에"라고 대답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연필에 가해진 힘과 연필의 움직임 사이에 인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 근거라는 것이 연필에 힘이 가해질 때마다 연필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는 것뿐이지 않은가?" 하는 질문이 여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질문은 자연 법칙을 따른다고 생각되는 모든 현상들에 관해 제기될 수 있다.
흄은 "두 대상이 일정하게 연속되어 나타나는 현상을 여러 번 경험하고 나면 우리는 앞의 대상을 원인, 뒤의 대상을 결과라고 부르며, 원인으로부터 결과로의 추리도 이와 같이 해서 성립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원인과 결과가 필연적으로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인간이 오랜 세월 동안 가져 온 습관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흄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인간의 사고방식과는 무관하면서 그 자체로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필연적인 자연 법칙'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며, 귀납 추론을 통해 과학의 방법론을 정립하고자 하는 시도도 사상누각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린다. 귀납 추론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문제는 '흄의 문제'라 불리며 오랜 세월 철학자들을 괴롭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