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납에 의존하지 않는 방법론
인간이 연역 논리를 사용한 것은 인류 역사에 비추어 보면 지극히 최근의 일이다. 호모사피엔스가 지구에 등장하여 의사 소통을 하고 자연을 이용하여 살아온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인류는 무의식적으로 경험에 근거한 귀납적 추론의 방식으로 지식을 얻고 축적해 왔다. 이처럼 인류의 삶을 있게 했던 것도, 또 과학이 시작되게 한 것도 귀납이지만, 논리적으로 흠결이 없는 방법론을 추구하는 현대의 철학자들에게 귀납이 가지는 논리적 문제가 그야말로 처치 곤란한 골칫거리였다.
영국철학자 포퍼는 적어도 과학의 방법론을 철학적으로 다룰 때만큼은 논리적 흠결이 있는 귀납에 의존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 모두 귀납에 의존하는 귀납적 방법론은 물론, 정당화의 맥락에서만 귀납에 의존하는 가설 연역적 방법론까지도 버리고, 귀납을 완전히 배제한 방법론을 고안하였다.
간혹 포퍼를 가설 연역주의자에 포함시키기도 하는데, 이는 포퍼와 가설 연역주의자들이 몇 가지 공통점을 지니기 때문이다. 우선 포퍼의 방법론은 "발견의 맥락에는 논리가 없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가설 연역주의와 공통점을 지닌다. 포퍼 역시 가설이 만들어지는 방식에는 제한을 두지 않았고, 오직 가설이 적합한 정당화 과정을 거치는가에 따라 과학과 비과학이 구분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정당화가 이루어지는 첫 단계가 연역을 통해 예측 사례를 도출하고 그것을 경험과 비교하는 시험 작업이라고 보았다는 점도 같다.
그러나 그 이후의 과정이 기대고 있는 논리는 판이하게 다르다. 가설 연역주의는 입증, 즉 귀납 논리에 의존하고 있고 포퍼의 반증주의는 연역 논리인 반증에 의존하고 있다. 과학적 방법론 논의 자체가 과학 활동을 중립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논리를 세우고 어느 정도의 규범을 제시하는 것임을 기억한다면, 정당화이 '논리' 대부분에서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포퍼의 방법론을 가설 연역주의에 포함시키는 것은 무리라고 할 수 있다.
입증과 반증의 비대칭
포퍼의 반증주의를 이해하려면 먼저 '반증'이라는 것의 논리적 특성부터 알아야 한다. 반증이란 어떠한 가설이 틀렸다고 판명되는 것을 말한다. "모든 백조는 하얗다"라는 가설의 예를 들어보자. 어디선가 하얗지 않은 백조가 한 마리 관찰된다면, 그 가설은 틀린 것으로 판명된다. 이처럼 가설과 모순되는 증거로 인해 가설이 틀렸음이 확인될 때 가설이 '반증'되었다고 하며, 가설을 반증시키는 증거(이 경우엔 희지 않은 백조의 관찰 사례)를 '반증 사례(줄여서 '반례'라고도 함)'라고 부른다.
보편 진술, 즉 '모든'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진술의 경우, 입증과 반증은 매우 다른 양상으로 진행된다. 입증 사례가 아무리 많다 해도 보편 진술의 입증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반증은 훨씬 수월하게 이루어진다. 단 하나의 반증 사례만 있어도 보편 명제의 반증은 가능하며, 이 경우 반증 사례의 수를 문제 삼을 이유도 없다.
"모든 백조는 하얗다"라는 말은 "단 한 마리의 예외도 없이 백조라면 하얗다"라는 말과 같다. 따라서 이 말이 틀렸음을 밝히는 데에는 단 한 마리의 예외로도 충분한 것이다. 입증과 반증이 이같이 다르게 진행되는 것을 가리켜 '입증과 반증의 비대칭성'이라 부르는데, 포퍼는 바로 이 비대칭성에 주목하여 입증 대신 반증을 정당화의 주된 논리로 선택했다.
포퍼가 반증주의를 제안한 진짜 이유
포퍼가 반증 사례와 반증을 과학 방법론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로 끌어올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입증 사례가 실제 과학 활동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과학자가 연구를 하고 이론을 다듬는 일차적인 목적은 실제 실험 결과와 잘 들어맞는 예측을 도출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포퍼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개별 예측의 입증 사례들이 이론이 '옳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안주해 버리면, 더 이상 새로운 이론은 만들어지지 않고 우리의 지적 세계도 정체되어 버릴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과학이 더 이상 발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포퍼는 바로 이러한 점을 경고하고 싶었던 것이고, 실제 과학 활동을 그대로 묘사하기만 하는 방법론보다는 고학을 옳은 방향으로 진보시킬 '규범'으로 작용할 수 있는 방법론을 만들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입증보다 반증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이론이 반증되면 그 반증 사례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뒤따를 것이고, 그러한 노력이 거듭되어야만 과학이 진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퍼에 따르면 입증 사례들의 역할은 이론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론이 '아직은' 반증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론에서 도출한 예측이 실험 결과와 잘 맞아떨어졌다면, 그 사례는 이론이 반증되고 폐기될 시점을 조금 뒤로 미루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포퍼는 '입증'과 '입증 사례'라는 말 대신 '용인'과 '용인 사례'라는 용어를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