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과 역사주의적 전회
1962년에 출간된 쿤의 저서 <과학 혁명의 구조>는 '20세기에 출판된 학술서들 중 가장 많이 인용된 책'이라는 명예를 수차례 안으며 과학철학뿐 아니라 인문,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다. 쿤은 과학의 본질과 그 성공에 대해 일반 사람들은 물론 과학 철학자들까지 품고 있던 '오해'를 풀고, 그에 관한 '진실'을 밝히고자 <과학 혁명의 구조>를 썼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오해라고 주장했던 통념들은, 우리의 소박한 상식으로는 오해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쿤 이전의 많은 과학 철학자들도 이러한 일반적인 통념들을 바탕으로 과학과 과학자의 행동 규범을 분석하고 있었다. 따라서 쿤은 용감하게도 "과학 방법론에 관한 그간의 논의들은 실제 과학사에 비추어 보면 거의 잘못되었다!"고 선언했던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 용감한 선언은 발표되자마자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과학 방법론을 비롯한 과학철학 논의를 함에 있어 실제 과학사를 면밀하게 연구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일깨움을 과학 철학계에 던져 주었다. 실제로 쿤 이후 많은 과학 철학자들이 실제 과학사를 바탕으로 한 과학 방법론을 탐구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움직임을 '역사적 전회(historical turning)'라 부른다. 또한 쿤에 의해 격파된 옛 관념들, 즉 이전의 과학 방법론을 '전통적 방법론'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관찰의 이론 적재성
과학 방법론들을 돌이켜 보면, 초점이 과학 가설 또는 이론에 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명제 또는 명제 집합으로서의 과학 가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또 어떻게 정당화되는가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뿐 우리가 '과학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매일 실제로 하고 있는 활동이 무엇에 기반하여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관한 이야기는 방법론 논의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쿤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과학철학의 관념들이 과학의 실제와 전혀 들어맞지 않게 되었다고 판단하고. 실제 과학 활동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실제 과학 활동을 면밀히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쿤의 통찰은 과학철학에서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으나., 그의 모든 성과가 쿤 혼자만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패러다임에 대한 착상은 때마침 심리학계에서 돌풍을 일으키던 형태주의 심리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형태주의 심리학은 인간이 어떤 것을 학습할 때 그 대상의 각 부분을 나누어 인식하고 그것을 종합하여 전체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파악을 먼저 한 후 그 인식에 따라 부분들을 익힌다는 것을 구체적인 실험으로 보여 주었다.
형태주의 심리학이 나오기 전에는 자극과 반응으로 인간의 행동과 학습을 설명하던 행동주의 심리학이 주류 심리학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행동주의 심리학에서는 우리가 부분들을 먼저 인식하고 그 결과들을 종합하여 전체를 인식하고 학습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의 과정은 그 반대이다. 부분에 관한 인식보다 전체에 관한 인식이 앞서고, 전자는 후자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바로 형태주의 심리학이 주장하는 핵심 내용이다.
과학 철학자 핸슨은 형태주의 심리학의 연구 결과들을 과학철학에 적극 수용했다. 핸슨은 과학에서도 과학자가 알고 있는 배경 이론에 따라 똑같은 대상이라도 다르게 보인다고 주장했다. '관찰의 이론 의존성' 또는 `관찰의 이론 적재성'이라 불리는 이 주장에 의하면, 관찰이라는 것이 이미 어떤 이론을 습득한 상태에서 그 이론의 틀에 맞추어 현상을 보는 것이므로 이론에 오염되지 않은 중립적인 관찰이란 있을 수 없다.
핸슨은 동틀 무렴 동쪽 하늘을 바라보는 티코 브라헤와 케플러는 같은 광경을 두고도 서로 다른 것을 본다고 주장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태양이 그 주위를 돈다는 이론에 물들어 있던 티코 브라헤는 지구의 빛나는 위성인 태양이 우리 주위를 도는 것을 보고, 태양이 중심에 있고 지구가 공전과 자전을 한다는 이론을 받아들이던 케플러는 지구가 자전해서 태양의 고도가 변하게 하는 것을 본다는 것이다.
쿤은 헨슨의 이러한 주장을 발전시켜, 관찰을 비롯한 과학 활동은 이미 존재하는 배경, 즉 패러다임에 기반하여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부분에 관한 인식을 결정하는 것이 전체에 대한 인식이고, 관찰을 결정하는 것이 이미 존재하던 이론인 것처럼, 개별적인 과학 활동을 이루어지게 하는 것도 이미 그 과학자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패러다임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