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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의 패러다임

by 코코아100 2024.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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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은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매우 여리 가지 의미로 사용했고, 그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들에 답할 필요성을 느낀 쿤은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통해 그가 전달하고자 했던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다 분명하게 밝히는 후기 저작들을 내놓았다. 쿤의 저작들을 종합해 보면, 그가 패러다임을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의 두 가지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넓은 의미의 패러다임

넓은 의미의 패러다임은 주로 초기 저작들에서 등장한다. 여기에는 과학 공동체를 이루는 전문가들이 과학 활동을 할 때 사용하는 것들이 거의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쿤은 이를 "전문 분야 행렬(diciplinary matrix)"이라 부르기도 했다. 넓은 의미의 패러다임에는 기호적 일반화, 과학 모형, 가치들, 범례들 등이 포함된다.


기호적 일반화란 한 공동체 내의 과학자들이 의문을 품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보편 명제들로, 우리가 보통 '이론'이나 '법칙'이라 부르는 것들과 가장 가깝다.


모형이란 이 세계를 어떻게 불 것인가에 관한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는 '이 세계는 아주 작은 당구공과 같은 물질로 가득 차 있고, 이 물질들이 서로 접촉하면서 힘이 전달된다'는 모형으로 세계를 바라보았고, 뉴틴은 '접촉하지 않은 물체들 간에도 힘이 작용한다'는 모형으로 세계를 보았다. 데카르트와 뉴턴의 모형처럼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가정들을 '존재론저 모형'이라고 한다.


존재론적 모형은 풀어야 할 문제를 결성하는 역할도 한다. 데카르트의 모형에서는 비접촉력인 중력은 설명을 필요로 하는 문제, 즉 피설명항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뉴턴 모형에서는 중력은 더 이상 설명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당연히 성립하는 것 중 하나가 되었으며, 중력을 이용해 다른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었다. 뉴턴 모형에서는 중력이 설명항의 위치로 이동한 것이다.


데카르트나 뉴턴의 모형처럼 세계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모형뿐 아니라 좁은 분야의 당면한 과제를 풀기 위한 가정들도 모형에 속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전기의 성격과 법칙을 알아내기 위해 '전류를 흐르는 물 같은 유체로 보자'고 가정하는 것인데, 쿤은 이러한 가정들을 '발견법적 모형'이라 불렀다.


넓은 의미의 패러다임에 속하는 또 다른 요소인 가치에는 정확성, 일관성, 적용 범위, 단순성, 다산성 등이 포함되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정확성 : 특히 양적 정확성을 문제 삼음. 다른 조건들이 똑같다면 이론으로부터의 예측치와 실제 실험으로 얻은 값이 가까울수록 더 좋은 이론이라고 평가.
  • 일관성(정합성) : 이론 내적 일관성, 주변 이론들과의 일관성을 모두 평가. 내부적으로 모순이 없고 주변 이론들과도 모순을 이루지 않는 이론이 좋은 이론.
  • 적용 범위 : 더 넓은 범위까지 적용된수록 좋은 이론이라는 기준.
  • 단순성 : 완전히 별개의 것들처럼 보였던 복잡한 현상들을 하나로 묶어 줌으로써 세계를 좀 더 단순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이론일수록 좋은 이론이라는 기준. 서로 무관해 보이는 현상들이 여러 개의 상이한 이론이 아닌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 가능하다면 그 이론을 통해 세계를 좀 더 단순하고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음.
  • 다산성: 생산적인 결과(새로운 현상 예측, 기존 현상들 간의 새로운 관계를 드러내는 것 등)를 많이 낼수록 좋은 이론이라고 보는 기준.

넓은 의미의 패러다임 안에 들어가는 또 하나의 요소인 '범례(exemplar)는 매우 특이한 지위를 갖는다. 후기 저작들에서 쿤이 말하는 패러다임은 이 범례를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범례를 따로 떼어 '좁은 의미의 패러다임'이라 부른다.

 

좁은 의미의 패러다임 - 범례

범례는 '모법적인 사례'라는 뜻으로, 특정한 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쳐 가야 한다고 생각되는 문제들을 뜻한다. 우리가 수학이나 과학 과목을 공부할 때면 이론 자체에 관해서도 배우지만 그것을 이용해 문제를 푸는 예를 직접 보여 주는 예제들도 배운다. 그리고 이론 자체에 대한 이해보다는 예제들에 익숙해짐으로써 그 이론에 대해 더 익숙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초보 과학자들이 훈련을 받는 과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전형적인 문제들에 대한 전형적인 해결 방법에 해당하는 실험이나 문제 풀이를 반복하면서 그 분야에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전통적 방법론에서는 범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과학의 어떤 개념을 익힐 때는 그 개념의 분명한 정의를 먼저 익히고 그것을 사용해서 법칙을 얻어내며, 그 법칙을 바탕으로 하여 더 높은 단계의 이론을 익히는 식으로 과학 개념이 학습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쿤은 실제 과학 활동에서는 어떠한 이론이나 법칙을 완전히 이해하기 전에 범례들을 먼저 접하게 되며, 그 범례들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통해 이론이나 법칙이 이해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쿤 자신이 학부와 대학원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던 과학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범례는 한 분야의 교과서나 논문들에 실림으로써 후배 과학자들에게 전형적인 문제들은 물론 해결 방식까지 물려주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한 공동체의 과학자들은 같은 범례들을 공유하게 되며, 공유하는 범례가 달라지면 다른 공동체로 볼 수 있게 된다. 패러다임을 좁은 의미로 해석한다면, 서로 다른 범례들을 공유하는 두 과학 공동체는 서로 다른 패러다임에 기반하여 과학 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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