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역사를 보는 관점은 시대에 따라 달라져왔다. 합리적 방법론을 중심으로 과학의 역사를 보려는 시도에서 시작하여, 자연관의 변화를 중심으로 과학의 역사를 해석하려는 관점을 거쳐 사회적 · 문화적 요인을 중심으로 과학의 역사를 보려는 관점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과학의 역사를 보는 관점에 따라 과학사가 어떻게 다르게 서술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합리적 방법론을 중심으로 본 과학의 역사
현대 물리학, 화학, 생물학, 그리고 지구과학 등의 과학 분야는 길게 잡아 지난 300~400년 사이에 서양에서 만들어진 역사의 산물이다. 이들 분야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과학적 지식은 다른 종류의 지식보다 훨씬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며, 또 유용한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근대적 전통의 과학사가 처음 시작된 것은 계몽의 시대인 18세기이다. 이 시기의 급진적 사상가들은 바로 이전 세기인 17세기에 등장한 갈릴레오와 뉴턴의 과학이 매우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갈릴레오와 뉴턴의 과학이 서양 사상의 진보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와 함께 많은 과학자 그리고 철학자들은 과학적 지식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가운데 19세기 중반부터 확립되기 시작한 실증주의적 관점은 많은 과학자 및 철학자들의 관심을 받았다. 프랑스인 콩트에 의해 확립된 실증주의는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사고를 배격하고, 관찰이나 실험으로 검증이 가능한 지식만을 받아들이고자 한다.
이 관점에 의하면 과학은 다른 종류의 지식에 비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과학은 경험, 관찰, 그리고 실험과 더불어 합리적인 추론의 성과들이 쌓여 가면서 점진적으로 진보해 온 것으로 해석된다.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많은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이러한 실증주의적 과학관을 받아들였다.
실증주의적 관점에서 과학의 역사를 보면 어떤 점을 중시하게 될까? 예를 들어, 갈릴레오가 자유낙하의 법칙을 알아내는 과정을 과학사학자들이 어떻게 그려내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16세기까지만 해도 자유 낙하하는 물체의 속도는 그 물체의 질량에 비례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이 지배적이었다. 많은 과학자들은 갈릴레오가 엄밀한 실험을 통해 자유 낙하 법칙을 알아냈다고 본다. 당시 수학 교수였던 갈릴레오가 피사의 사탑에서 질량이 다른 돌들을 떨어뜨리는 실험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을 깨뜨렸다는 일화는 그 진위 여부를 떠나, 과학이 관찰 또는 실험을 통하여 발전했다고 보는 입장을 잘 대변하고 있다.
이처럼 실증주의적 관점을 가지게 되면 과학의 역사에서 관찰과 실험과 같은 방법적인 측면, 그리고 이를 통한 과학의 진보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자연관의 변화를 중심으로 본 과학의 역사
20세기 초반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전문적인 과학사 연구자들은 실증주의적인 관점과는 조금 다른 입장에서 과학의 역사를 바라보고자 하였다. 사상사라고 부르는 역사학적 접근이 그것이다.
이들은 관찰과 실험 및 추론의 결과만으로 과학이 계속 진보해왔다고는 보지 않으며 대신 과학 이론의 발전에 개입하는 지적인 요소들을 중시한다.
예를 들어, 자유 낙하의 법칙을 수학적으로 기술해 내는 작업이 단순히 관찰과 경험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자연에 대한 관점이나 사고방식의 틀이 변한 것을 강조한다.
이처럼 자연관을 중시하는 관점에서는 갈릴레오가 피사의 사탑에서 실제로 자유낙하 실험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대신 갈릴레오가 수학적인 세계관을 강조하는 플라톤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는 점을 더 강조한다.
예를 들어 갈릴레오는 “자연은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인 책이다."라는 자연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자유 낙하 현상도 수학적으로 기술하려고 하였다. 즉, 이러한 관점에서는 갈릴레오가 그 이전 학자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실험을 시도했다는 점보다도 자연의 변화를 수학적으로 기술하려는 새로운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중시한다. 또한, 물체가 왜 땅으로 떨어지는가 보다는 물체가 어떻게 떨어지는가 하는 문제를 더 중시하는 쪽으로 지식이 변화한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따라서 이러한 입장에 선 과학사학자들은 보통 갈릴레오의 자유 낙하 실험을 실제실험이 아니라 일종의 사고 실험이었던 것으로 해석한다. 실제 실험은 사고 실험 이후에 그의 주장을 확인해 보는 부차적인 과정으로 간주된다.
사회적·문화적 요인을 중심으로 본 과학의 역사
1960년대 후반 이후 과학을 둘러싼 제도적 · 사회적 · 문화적 맥락 속에서 과학의 역사를 이해하려는 외적 접근법이 점차 강조되기 시작되었다. 과학사의 외적접근법이 강조되면서 과거의 과학을 당시의 사회·문화 · 제도 · 경제적 여건 속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확대되었다. 또한 과학이 그 속에 살던 당시의 사람들에게 지녔던 의미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도 많이 시도되었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게 되면 갈릴레오를 볼 때 실증주의적 관점이나 사상관점과는 다른 면에서 접근하게 된다. 예를 들어 갈릴레오는 오늘날의 학자들과는 다른 목적으로 연구를 하고 책을 썼다. 물론 자연 현상에 대한 호기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여기에 더해서 갈릴레오는 당시 자신을 재정적 · 정치적으로 후원해 줄 수 있는 권력자들의 후원을 받기 위한 의도로 글을 썼다.
1610년 1월 어느 날갈릴레오는 자신이 개량한 망원경으로 목성 주위를 도는 위성들을 관찰했다. 당시갈릴레오의 고향이었던 토스카나(Tuscany) 공국은 메디치 가문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갈릴레오는 이 메디치가의 후원을 얻어낼 목적으로 이 위성들을 '메디치의 별들'이라고 불렀다. 메디치가로서는 자신들의 통치가 하늘이 정한 것이라고 말해 주는 갈릴레오의 선물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갈릴레오의 의도는 적중하여 그는 마침내 메디치 궁정의 철학자이자 수학자가 되는 데 성공한다. 즉, 갈릴레오는 궁정인 수준으로 지위가 상승된 것이다. 이는 발견의 우선권을 매우 중시하고 발견자에게 그 과학적 영광을 돌리는 오늘날의 과학적 풍토와는 다른 모습이다.
갈릴레오의 예는 권력자가 과학자를 후원하고 또 과학자는 과학적 성과를 통해 권력자의 위상을 높여주던 사회적 · 문화적 상황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영화 '쥐라기 공원'이 세계적으로 흥행하고 나서, 영화의 성공에 힘입어 고생물학이나 지질학에 연구비가 엄청나게 많이 투자된 적이 있다. 과학의 방향은 이처럼 학문의 후원체계나 제도적 장치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사회적 필요를 중심으로 본 과학의 역사
실증주의적 입장에 서 있는 과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은 과학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그려내야 한다고 보았다. 과학자들이란 자신이 처한 정치적 · 사회적 · 문화적 환경의 영향을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과학 외부의 영향이 개입할 경우 과학은 제대로 진보할 수 없다고 이들은 생각하였다.
여기에는 20세기 전반에 사회주의 국가에서 등장했던 과학사관에 대한 반작용이 작용했다. 당시에 마르크스주의 과학사학자들은 과학이란 자연을 기술적으로 통제하려는 활동의 결과물이며 과학적 지식은 과학자가 활동하는 사회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들은 과학이 모든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키고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고자 할 때 제대로 발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시각에서는 갈릴레오가 자유 낙하 법칙을 발견하게 된 가장 큰 힘을 당시의 실용적 필요성에서 찾는다. 당시 유럽에는 운하의 건설이나 축성과 같은 대규모 토목 공사가 많이 진행되고 있었다. 갈릴레오 역시 이탈리아의 운하 건설사업이나 포환의 탄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관점에 의하면 학자로서 이론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장인적인 기질도 함께 지니고 있었고 또한 실용적인 문제들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점이 갈릴레오가 많은 과학적 성과를 이루도록 한 중요한 동력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