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은 과학이 아니라 과학에 관한 학문이다. 이처럼 어떤 학문에 관한 학문을 '메타 학문'이라 부르므로 과학철학은 일종의 '메타과학'이라 할 수 있다. 과학이라 불릴 수 있는 활동은 오래 전부터 비교적 체계를 갖추고 발전해 왔지만, 메타과학이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 과학의 여러 가지 분야의 일이다. 메타과학 중에서도 특히 과학에 관해 철학적으로 연구하는 과학철학은 20세기가 되어서야 독립된 학문 분과로 인정되었다.
1 과학철학이란 무엇인가
과학철학이란 '과학에 관한 철학적 탐구'라고 풀이된다. 따라서 과학철학이 어떤 학문인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과학'과 '철학적 탐구'의 의미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철학'이라는 단어를 자주 접한다. "철학이 있는 경영자",“OOO의 인생 철학” 같은 말이 방송이나 책, 뉴스 등에서 심심치 않게 언급되며, 사주나 점을 봐주는 무속인도 “철학관"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영업을 하고 있다. 이때의 ‘철학'은 세계와 현상, 사물과 인간 등의 본질에 대한 깊은 생각을 의미하는 것으로, 굳이 분류하자면 일상적 의미로서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철학”, “경제 철학”, “정치 철학" 등의 말에 들어가는 '철학'은 이러한 일상적 의미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가리킨다.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체계적이고 엄격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일상적 의미의 철학과 큰 차이를 보인다. 우리나라의 철학자 곽강제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과학 철학자들이 말하는 철학적 탐구는 크게 논리적 분석과 개념적 분석, 그리고 새로운 세계관의 형성이라는 세 가지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논리적 분석이란 세계와 현상, 사물, 인간, 인간의 행동 등에 관한 우리의 신념들이 믿을 만한 것들인지 검토하는 작업이다. 그 신념들이 주장될 때 믿을 만한 근거들이 함께 제시되었는지, 그 근거들과 주장들이 논리적 결함 없이 잘 연결되고 있는지 등을 비판적으로 조사하는 일이 이에 해당한다.
개념적 분석은 말 그대로 신념들을 주장하거나 비판할 때 사용되는 개념들을 분석하는 작업이다. 철학자들이 학문적 주장을 하거나 논쟁을 벌일 때는 자신이 사용하는 단어들의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하며, 논의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기초 개념들일수록 그 의미에 관한 비판적 검토가 반드시 필요하다.
새로운 세계관의 형성이란 세계와 인간, 현상 등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와 주는 새로운 개념이나 이론을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 새로운 세계관 형성에 사용된 개념이나 이론은 논리적 분석과 개념적 분석을 거친 것이어야 하지만, 새 세계관의 요소들은 또 다른 철학자들에 의해 다시 논리적, 개념적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처럼 이 세 가지 작업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반복되며, 그 과정에서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현상을 조금씩 더 잘 이해하게 해 주는 새로운 개념과 이론들이 계속 제안된다. 학문으로서의 철학 연구가 인간 사고의 지평을 넓혀 준다고 이야기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이러한 활동으로 이루어진다면, 과학에 관한 철학적 탐구란 과학의 주장들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과학적 개념의 의미를 분석하며 그 주장과 개념들이 어떤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할 수 있는가를 알아보고 또 그에 대한 비판을 가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과학'이라는 개념의 의미를 묻는 “과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그 자체로 과학철학의 중요한 활동 중 하나이자 과학철학의 출발점이 된다.
그렇다면 '과학'이란 무엇인가. '학교에서 과학 시간에 배우는 것' 또는 '물리, 화학, 생물학, 지구과학 같은 것'이라는 대답은 일상적인 대답은 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원하는 수준의 철학적인 대답은 될 수 없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 개념, 즉 설명되어야 하는 개념인 '과학'이라는 말이 대답들 속에 직접적으로(과학 시간', '지구과학'의 경우) 또는 간접적으로(물리', '화학', '생물학'이라는 말은 각각 '물리과학', '물질의 화학적 성질과 원리에 관한 과학', '생물과학'과 같은 말로 바꾸어 쓸 수 있으므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질문에서의 '과학'이라는 단어 또는 "과학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처럼 설명을 필요로 하는 항목을 '피설명항'이라고 부르고, 피설명항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말들을 '설명항'이라 한다. 어떤 개념의 정의를 묻는 철학적 질문에 답 할 때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그 개념, 즉 피설명항을 사용하지 않고 설명항을 구성해야 한다. 따라서 위에서 제시한 두 가지 대답은 피설명항을 여전히 등장시키고 있으므로 철학적 답변이라고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떤 답이 철학적으로 올바른 대답인가? 철학적으로 만족할 만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좀 더 구체적인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과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은 과학의 본질에 관한 질문, 즉 “과학이라는 학문 활동은 어떤 특성을 지니기에 다른 학문 활동과 구별되는가?"라는 질문과 실질적으로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과학철학을 시작하면서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탐구는 과학 활동이 다른 활동과 어떻게 다른가를 고찰하는 것이다.
2 과학철학에서 과학적 방법론
예로부터 과학 활동에 관심을 가졌던 과학자나 철학자들은 대상이나 주장하는 내용이 아니라 그것이 이루어지는 '방법'에 의해 과학이 다른 활동과 구분된 달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어떤 활동을 과학이게 하는 방법이란 무엇인가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이런 질문을 다루는 과학철학의 주제를 '과학적 방법론'이라고 한다.
모든 과학철학자들이 과학과 과학이 아닌 활동이 뚜렷이 구분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학만의 특수성을 인정하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과학과 다른 활동을 비교하며 논의하려면 과학 활동의 방법을 논의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 길이라는 것에는 동의하고 있다. 다루는 대상이나 실험의 유무, 주장 내용의 사실성 여부 등의 기준으로 다른 활동과 과학을 구별하려는 시도는 아예 첫 단추부터 끼우지 못한 채 좌절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과학적 방법론 논의가 과학철학의 전부는 아니다. 과학철학이 다루는 주제들은 매우 다양하다. 하나의 이론이 다른 이론이나 후속 이론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에 관해 집중적으로 논의하는 과학적 환원, 성공적인 과학 이론의 주장들이 과연 참이며 과학에서 다루는 대상은 정말로 존재하는가를 다루는 과학적 실재론/반실재론 논쟁, 과학 이론들에서 주장되는 가설들과 증거들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과학적 증거론, 과학 이론과 법칙의 특성에 관한 논의, 과학적 설명은 어떤 것인가에 관한 논의 등, 일일이 그 세부 분야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이다.
과학적 방법론은 과학철학의 이 많은 세부 분야들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과학적 방법론은 다른 논의들과는 달리 “과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과학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서 시작되는 만큼, 방법론은 과학철학 논의의 출발점에 위치한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